은둔형 아줌마의 100일 걷기 챌린지

[100일 걷기 챌린지]52일차. 패션 잡지에서 시인을 만나다(feat. 미용실)

문쌤 2022. 11. 6. 23:58

 

은밀히 깊숙한 곳에서 조금씩 자라던 흰 머리카락이 최근 들어서는 눈에 띄게 많아져서 조금 신경이 쓰였다.

강경화 장관처럼 전체 흰머리카락이면 멋스럽겠지만 눈에 띄는 몇 가닥은 뽑든지 염색하든지 둘 중 하나다.

 

안 보이는 부분에 흰 머리카락이 있는 건 상관없지만 겉으로 드러나게 많아지면 염색을 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 정도면 흰 머리카락 뽑으려다 대머리 되기가 십상이다.

전체 은발이 되면 차라리 염색 하지 않고 다닐 예정이다. 그날이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미용실에 갔다.

스타일 상담 - 커트 - 단백질 머시기 - 파마 - 염색 

 

이 과정을 거치는 동안 가만히 앉아 있다가 미용사가 시키는 대로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몇 번 하면 모든 과정이 끝나는 일인데도 에너지가 방전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미용실에는 고객들의 심심함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패션 잡지가 많이 구비되어 있는데 그 중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고급 코팅 종이. 화려한 색감. 유명 브랜드 화장품, 옷, 액세서리 광고들이 대부분이다.

책장을 휘리릭 넘기다 눈에 띄는 기사를 발견했다.

젊은 시인 인터뷰 기사다.

 

한 면 가득 차지한 그녀의 사진은, 시인이라는 소개가 없었다면 개성이 뚜렷한 배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입매며 눈매가 아주 야무지다. 

 

 

 

성다영 시인 그리고 그의 첫 시집 《스킨스카이》

 

성다영 시인의 대표 시이면서 제목이기도 한 <스킨스카이>를 찾아 읽어보니 무미건조한 나의 감성으로 이해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점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우선, 앞표지에 제목이 없다.  독특하면 독자들의 눈에 얼른 띄겠지만 너무 독특하지 않나.

 

대신 책 등에 출판사와 시집 제목을 적었다. 그 제목마저도 튀는 색깔이 아니다.

어떻게 이런 실험적인 방법으로 출판할 생각을 했을까?

참 독특하면서도 야무지다. 

 

 

두 번째로는 시집 한 권에 큰 글씨로 한 번, 작은 글씨로 또 한 번 반복해서 엮은 점이다.

 

40대 이후에 눈의 노화가 시작되어 활자를 읽는데 불편함을 느낀다.

요즘엔 도서관에 '큰 글씨 도서'가 따로 비치되어 있을 정도로 시대가 변해서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는데 이 시집은 아예 대놓고 큰 글씨 번전과 일반 글씨 크기 버전을 한 권으로 엮었다. 

 

시력이 좋고 나쁨을 떠나 누구라도 불편함 없이 시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한 시인의 배려가 담겨있다.

 

 

인터뷰 중간에 '뒤에서 앞으로 읽는 시' 전문이 조그맣게 실려있는데 이해하는데 한참 걸렸다. (함축된 언어인 시를 한두 번 읽고 어떻게 이해를 하겠는가) 

미용실에 앉아 시 한 편 읽기 위해 애쓴 건 처음인 것 같다.

 

 

미용실에서 머리 하는 동안 성다영 시인에 대해 알아보느라(이해하려) 시간은 심심하지 않게 흘러갔다.

 

 

 

사랑의 에피파니 / 詩 · 성다영

 

 

 

  이것은 물의 비유가 아니다

사람들이 진짜를 말할 때 나는 가짜가 떠오른다 가짜를 말할 땐? 잠깐 눈물 좀 닦을게 물? 너는 당황한다 아니야 이것은 물의 비유가 아니야

너는 마스크를 쓰고 말하지 신은 사람을 아주 작은 먼지로 만들었대 처음엔 바다밖에 없었고 바다? 아니야 이건 물의 비유가 아니야

기억하는 것보다 잊는 것이 더 어렵네

습기로 가득한 여름

도시는 온통 늘어지는 초록으로 가득해

나를-잡지-마-나를-잡지-마

이-세계의-폭력-속으로-뛰어들-거야

사랑은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네

나는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네

사랑은 낮에 이어지네

⠀사람들이-상상하는-사랑-사랑을-사랑으로-만드는-슬픈-결말-반대-엇갈림-불치-나에게는-환상없음

⠀이 순간이 지나가는 것이 아쉬워요

그러니 즐기세요

연주자가 마지막으로 인사하며 말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

나는 잠깐 사라질게

⠀아름다운 순간

영혼의 반대말은 시체다*

헤어지기 아쉬운 사람들

어쩔 수 없는 거야?

길에서 서로의 손을 만진다

태어남

이 이미지에는 환상이 없다

사람들은 나를 모른다

한 번도 보여준 적 없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말하지

사랑해

*장-피에르 보 『도둑맞은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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