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히 깊숙한 곳에서 조금씩 자라던 흰 머리카락이 최근 들어서는 눈에 띄게 많아져서 조금 신경이 쓰였다.
강경화 장관처럼 전체 흰머리카락이면 멋스럽겠지만 눈에 띄는 몇 가닥은 뽑든지 염색하든지 둘 중 하나다.
안 보이는 부분에 흰 머리카락이 있는 건 상관없지만 겉으로 드러나게 많아지면 염색을 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 정도면 흰 머리카락 뽑으려다 대머리 되기가 십상이다.
전체 은발이 되면 차라리 염색 하지 않고 다닐 예정이다. 그날이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미용실에 갔다.
스타일 상담 - 커트 - 단백질 머시기 - 파마 - 염색
이 과정을 거치는 동안 가만히 앉아 있다가 미용사가 시키는 대로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몇 번 하면 모든 과정이 끝나는 일인데도 에너지가 방전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미용실에는 고객들의 심심함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패션 잡지가 많이 구비되어 있는데 그 중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고급 코팅 종이. 화려한 색감. 유명 브랜드 화장품, 옷, 액세서리 광고들이 대부분이다.
책장을 휘리릭 넘기다 눈에 띄는 기사를 발견했다.
젊은 시인 인터뷰 기사다.
한 면 가득 차지한 그녀의 사진은, 시인이라는 소개가 없었다면 개성이 뚜렷한 배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입매며 눈매가 아주 야무지다.
성다영 시인 그리고 그의 첫 시집 《스킨스카이》
성다영 시인의 대표 시이면서 제목이기도 한 <스킨스카이>를 찾아 읽어보니 무미건조한 나의 감성으로 이해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점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우선, 앞표지에 제목이 없다. 독특하면 독자들의 눈에 얼른 띄겠지만 너무 독특하지 않나.
대신 책 등에 출판사와 시집 제목을 적었다. 그 제목마저도 튀는 색깔이 아니다.
어떻게 이런 실험적인 방법으로 출판할 생각을 했을까?
참 독특하면서도 야무지다.
두 번째로는 시집 한 권에 큰 글씨로 한 번, 작은 글씨로 또 한 번 반복해서 엮은 점이다.
40대 이후에 눈의 노화가 시작되어 활자를 읽는데 불편함을 느낀다.
요즘엔 도서관에 '큰 글씨 도서'가 따로 비치되어 있을 정도로 시대가 변해서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는데 이 시집은 아예 대놓고 큰 글씨 번전과 일반 글씨 크기 버전을 한 권으로 엮었다.
시력이 좋고 나쁨을 떠나 누구라도 불편함 없이 시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한 시인의 배려가 담겨있다.
인터뷰 중간에 '뒤에서 앞으로 읽는 시' 전문이 조그맣게 실려있는데 이해하는데 한참 걸렸다. (함축된 언어인 시를 한두 번 읽고 어떻게 이해를 하겠는가)
미용실에 앉아 시 한 편 읽기 위해 애쓴 건 처음인 것 같다.
미용실에서 머리 하는 동안 성다영 시인에 대해 알아보느라(이해하려) 시간은 심심하지 않게 흘러갔다.
사랑의 에피파니 / 詩 · 성다영
이것은 물의 비유가 아니다
⠀사람들이 진짜를 말할 때 나는 가짜가 떠오른다 가짜를 말할 땐? 잠깐 눈물 좀 닦을게 물? 너는 당황한다 아니야 이것은 물의 비유가 아니야
⠀너는 마스크를 쓰고 말하지 신은 사람을 아주 작은 먼지로 만들었대 처음엔 바다밖에 없었고 바다? 아니야 이건 물의 비유가 아니야
⠀기억하는 것보다 잊는 것이 더 어렵네
⠀습기로 가득한 여름
⠀도시는 온통 늘어지는 초록으로 가득해
⠀나를-잡지-마-나를-잡지-마
⠀이-세계의-폭력-속으로-뛰어들-거야
⠀사랑은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네
⠀나는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네
⠀사랑은 낮에 이어지네
⠀사람들이-상상하는-사랑-사랑을-사랑으로-만드는-슬픈-결말-반대-엇갈림-불치-나에게는-환상없음
⠀이 순간이 지나가는 것이 아쉬워요
⠀그러니 즐기세요
⠀연주자가 마지막으로 인사하며 말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
⠀나는 잠깐 사라질게
⠀아름다운 순간
⠀영혼의 반대말은 시체다*
⠀헤어지기 아쉬운 사람들
⠀어쩔 수 없는 거야?
⠀길에서 서로의 손을 만진다
⠀태어남
⠀이 이미지에는 환상이 없다
⠀사람들은 나를 모른다
⠀한 번도 보여준 적 없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말하지
⠀사랑해
*장-피에르 보 『도둑맞은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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