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형 아줌마의 일상 이야기]

딸내미와 함께 걷는 부산 이기대 해안산책로 (이기대 해안산책로 정보 없음 주의)

문쌤 2023. 1. 10. 10:21


좀 더 예쁘게 포장할 수도 있지만
1년 후, 10년 후, 20년 후에도
꺼내보며
회상할 수 있도록
사실 그대로
적어보려고 한다^^



연차 쓰고 일 보러 부산에 가는 딸내미에게 빌붙은 게 아니다.
호텔에서 혼자 잔다며 교통비 및 식사, 카페까지 전부 쏘겠으니 그냥 따라오기만 하라는 딸내미 말을 덥석 물었을 뿐이다.
매 끼니 밥 안 해도 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

부산에 가면 항상 범어사에 들렀기 때문에 이번에도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범어사 자체로도 좋지만 걸어서 올라가는 길이 너무 좋다. 내가 생각하는'사찰 가는 길' 딱 그거다.

하지만 시간 상 딱 한 군데만 갈 수 있다고 해서 둘이 합의 본 장소는 바로 이기대 해안산책로.

이기대 동생말에부터 출발했다.
동생말에서 오륙도 선착장까지는 4.7km

그동안 쌓아온 걷기 경력으로 보아 이 정도는 거뜬할 것 같아 전혀 부담이 없었다.(이 넘치는 자신감, 어찌하리오~^^)

이기대 산책로는 자연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포토스팟이 많아 발걸음 옮기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 예쁜 문구가 새겨진 포토스팟을 만나면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진 찍느라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간다.

점심 식사 후 출발한 우리는 경치에 반해 출발지점에서부터 풍경 사진, 독사진 찍느라 시간가는줄 몰랐다.

이때는 참 좋았다.
약간 흔들리는 구름다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깔깔대며 즐거웠으니까.

전에 가봤던 누리마루 APEC하우스가 건너편에 보인다.
부산, 울산, 양산을 자주 다니던 때가 있었던 터라 옛 추억에 잠겨 한참 감상에 젖었다.
최근 7~8년은 기억에서 사라진듯 자꾸 옛 기억을 더듬게 된다.

그러고 보니 현재 모습의 이기대 해안산책로는 예전에 없었다.
규모의 크기를 떠나 걷기 편한 데크길이 많이 생겨서 인근 주민들 뿐 아니라 관광객에게도 환영받으니 참 좋은 일이다.

광안대교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제법 많이 걸은듯 하다.

하지만 이때는 몰랐다.
동생말에서 거의 비슷하게 출발한 사람들이 1km쯤 걷고보니 어느 순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우리만 계속 앞으로 걸어갈 뿐 다른 사람들은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이때 판단을 잘했어야 했음^^)

평평하고 아름다운 길만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인생처럼 이기대 해안산책로는 만만하게 볼 길이 아니다.

푸른 바다로 눈호강을 했다면 그다음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연달아 펼쳐진다. 일명 병 주고 약 주고 하는 식이다.

파도가 잔잔한 편이어서 경치 감상에는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흰 포말이 한번씩 스칠 때마다 또르르 구르는 작은 돌멩이 소리도 노래처럼 들린다.

넓은 바위 위에 앉아 일렁이는 파도를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기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바위 위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
땡깡쟁이 딸내미와 조금이라도 빨리 오륙도 선착장까지 가야 한다는 거~!

찍느라 고생했으니 파도 소리 한 번 더 듣고~ ^^

<봄이 오는 길> 시 비.
이런 건 한 번씩 읽는 게 예의다^^


봄이 오는 길 (詩 최계락)

봄은
바다를 건너

남쪽에서 온다.

거치른 산
메마른 들판
꽃수레에 실려
봄은 언덕을 넘고

넘치는
그 잔잔한 강물처럼

봄은
내 마음 속
나직한 한 가닥
아,
노래로 온다.


홍콩까지 2,029km, LA까지 9,636km.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맨 마지막

You ♥ I의 거리는 몇 km?

이게 중요한 거였어^^

돌개구멍 - 바위의 틈에 있던 자갈이나 모래가 파도에 의해 회전하면서 오랜 시간 바위의 틈을 깎아 만든 것이다.

이기대는 약 8천만 년 전 격렬했던 안산암질 화산활동으로 다양한 화산암 및 퇴적암 지층들이 파도의 침식으로 천혜의 절경을 이루고 있는 부산국가지질공원이다.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 구경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붉은 애기동백.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꽃 취향도 바뀌는지 요즘 붉은 동백이 참 좋다.
지천에 널려있을 땐 눈길 한 번 안 주다가 뒤늦게 홀딱 반하는 중이다.

파도는 잔잔하고 하늘엔 붉은 물감 한 방울 떨어뜨려놓은 듯하다.
조금 더 있었더라면 시 한 편은 쓰지 않았을까 싶다^^

데크길도 편하고 좋지만 이런 흙길 걷는 걸 더 좋아한다.
이땐 이런 낭만적인 생각을 하며 걸었더랬다^^

제법 해가 기울었다.
붉은 물감 한 방울 정도가 아니라 물을 많이 머금은 붓이 한 번 쓰~윽 지나간 느낌이다.

아직 갈길은 먼데 부츠 신은 딸내미는 발가락 아프다며 더 이상 못 걷겠단다.
데크길에선 잠깐 신발을 벗고 걸어도 된다고 했다가 온갖 짜증을 다 받아내야 했다.
결국 신발 벗고 걸을 거면서~ ^^

끝나는 지점을 알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걷기의 연속.
한 모퉁이 돌 때마다 새로운 경치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론 딸내미 눈치 살피느라 마음껏 감상할 수 없었다.

달이 떴다!!!!

빨리 가자!!!!!

뒤를 돌아보니 까마득하다.
이젠 뒤로 돌아갈 수도 없다.

무조건 앞으로!!!!!

아직도 갈길이 먼데 제법 어둠이 내려앉았다.
집 근처에서 잠깐 여행인 듯 여행 아닌 여행 같은 걷기를 할 때에도 항상 해가 떨어지기 전에 집에 도착했기 때문에 이런 어스름에 익숙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안내판 뒤로 조그맣게 농바위가 보인다.
해안가에서 물질하는 해녀들이 옷 등을 담아두는 농을 닮았다 하여 농바위라고 불린다.
점점 어둠이 짙어서 잘 안 보였다^^

이때부터 멘탈이 나간 듯...
더 이상 못 걷겠다는 딸내미와 나 역시 체력이 바닥나서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여기서 엄청 싸웠다.
보통 1시간~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는데 우린 시간 체크를 해보니 2시간 30분 걸렸다.
1년 싸울 양을 2시간 30분 동안, 특히 이곳에서 집중적으로 싸운 것이다.

<불편해도 괜찮아>에 나오는 지랄 총량의 법칙처럼 2시간 30분 동안 싸운 걸로 퉁치고 2023년엔 사이좋은 모녀관계였으면 좋겠다.



휴대폰의 손전등을 켜고 걸었다.
걷는 도중 어둠 속에서 덩치 큰 뭔가가 툭 튀어나왔다.

으~악~!!!!!!!!



해안 절벽에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린 서로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휴우~ 식겁했다.
늦은 시간에 산책하는 동네 주민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왜 손전등도 없이 놀라게 하시는지...;;

고맙게도, 어두워서 위험하니까 아파트 쪽으로 가라고 알려주고는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산에서 손전등 없이 찍은 마지막 사진.
귀신 나오는 줄~ ;;

좁고 어두운 산길을 따라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다.(살고있는 사람들은 좋을지 모르겠지만 외지인이 봐도 왠지 이곳은 아파트가 들어서면 안 될 것 같은~)


카카오 택시 불러 서면의 호텔까지 고고~

심신은 이미 너덜너덜 만신창이인데 이동하는 동안 너무도 친절한(?) 기사님의 끝없는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원래 부산 사람이 아닌데 어느 지역 말투 같냐, 전쟁 나면 서울 쪽은 죽을 확률이 높다, 부산은 아직도 부동산이 저렴하다 등등

2시간 30분 동안 걸어서 굉장히 힘들다고 했는데도 이동하는 30분 동안 잠시도 쉬지 못하게 했다.

귀에서 피나는 줄 알았다.


ps.
그 이후로는 편하게 쉴 것 같지만 천만에... 딸내미의 무수리가 되어야 했다.

"엄마, 욕조에 물 받아줘"

"엄마, 부츠에 흙 묻은 거 닦아줘"

'엄마'라고 부르질 말든지...
돈 내는 사람이 갑이라는 말, 처절하게 실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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