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형 아줌마의 중국 생존기 10

[중국 일상 이야기]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에피소드

네이버 검색을 통해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 대해 살펴보면, '세계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날로, 1908년 3월 8일 미국의 여성 노동자들이 근로여건 개선과 참정권 등을 요구하면서 시위를 벌인 것에서 시작됐다. 이후 유엔은 1975년을 ‘세계 여성의 해’로 지정하고 1977년 3월 8일을 특정해 ‘세계 여성의 날’로 공식 지정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2018년 법정기념일로 공식 지정돼, 관련 단체들이 다양한 행사들을 진행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의 여성의 날은 어떨까? 우리나라에서는1920년부터 나혜석·박인덕 등이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해 왔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맥이 끊겼다가 1985년부터 공식적으로 기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8년 2월 20일 여성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지정하는 ..

8화. 인연― 그때는 만났고 지금은 헤어진...(2018년 중국에서)

때는 바야흐로 2018년 중국, 어느 가을날에 만난 사람 이야기를 하자면 먼저 등장인물 소개부터 해야 한다. 심 언니: 나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다. 같은 이름의 아파트(100여 동 정도 됨)에 사는데 보통의 아파트와는 달리 부유한 몇 집만이 산다는 마당과 차고가 있는 3층짜리 단독에 산다. 아파트 상가 댄스 학원에 남편과 함께 우연히 방문했다가 서른 명 정도 되는 중국 아줌마들 중에서 유일하게 나에게 말을 걸어준 사람이다. 그날 위챗(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같은) 큐알 코드를 찍어 위챗 친구가 되었다. 사진작가: 심 언니와 같은 회사에 근무하다가 정년퇴직한(회사마다 정년퇴직 나이가 다른지 모르겠으나 그들이 다닌 회사는 50세가 정년퇴직) 사이이며 나와 나이가 같다. 전문과 아마추어 그 사이 어디쯤에 있..

7화. 또 가고 싶은 칭다오 랜드마크 5·4 광장의 '5월의 바람' 그리고 장예모 감독의 '야간 조명쇼'

중국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 중 칭다오(青岛)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다시 가고 싶은 도시다. 남편과 둘이서 처음 갔다가 너무 좋아서 다음 해에는 딸내미 여름방학에 맞춰 한번 더 다녀왔던 곳이다. 패키지여행을 좋아하지 않았던 남편 때문에 칭다오 역시 처음 갔을 때부터 패키지여행은 하지 않았다. 동네 어슬렁 거리며 다니기 위해 시청 바로 옆에 호텔을 정한 후 버스나 택시 등 대중교통을 타고 다녔다. 시내버스는 대부분 시청 앞을 지났기 때문에 웬만한 관광지는 동네 주민처럼 버스나 택시 아니면 걸어 다녔다. 동네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사람 구경하기엔 더없이 좋은 방법이다. 검색창에 칭다오에서 '가 볼 만한 곳'을 검색하면 '칭다오 맥주 박물관'이 1위, '칭다오 5·4광장'이 2위, '잔교'가 3위 정..

6화. 키워드 '비(雨)'와 관련한 중국 에피소드

어제(8일)부터 서울, 경기, 인천 지역에 100~300mm 물폭탄으로 인한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정확한 지는 모르겠으나 '100년 만의 폭우'라는 제목의 신문 기사가 인터넷에 많이 올라와 있으며 비 피해로 인해 주택과 자동차 침수 그리고 인명 피해까지 이어지고 있다. 뉴스로 비 피해 소식을 접하니 마치 재난영화의 한 장면 같다. 비(雨)와 관련한 작은 에피소드 중국 양저우에 사는 동안 어제오늘처럼 큰 비가 내리지 않았지만 우기에 접어들면 차(車)가 없는 나의 학교 가는 길은 '전쟁터'에 가는 심정만큼이나 비장한 각오를 해야 했다. 2015년 그즈음 베이징이나 상하이 같은 대도시의 상황은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살던 양저우는 그에 비하면 작은 도시였기 때문에 공중도덕과 위생 개념은 그다지 지켜지지 ..

5화. 중국에서 있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

아줌마 유학생 시절,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일어난 일이다. 한국에 있는 몇몇 대학교는 중국 장수성 양저우 대학교와 자매결연을 맺거나 교환학생으로 갈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유학생의 교통사고 어느 날, 한국 유학생 한 명이 띠엔동처를 타고 시내에 나갔다가 자동차와 부딪히는 사고가 났다. 띠엔동처란(电动车 전동차)? 오토바이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电动车 즉, 전기 배터리로 운행하며 평균 속도 시속 30~50km다. 띠엔동처는 면허가 필요 없어 중국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하필 그 유학생은 기초반이어서 위급상황에 대처할 만한 회화 실력이 되지 않았다. 회화 실력이 좋다 해도 교통사고로 쓰러져 있는데 외국에서 어떻게 빨리 대처할 수 있겠는가. 나중에 들은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그 유학생은 띠엔동처가 자..

4화. 보고 싶은 나의 중국어 선생님

내가 Y선생님을 처음 만난 건 2018년 봄학기였다. Y선생님은 江苏省 扬州大学 外语学校에서 阅读를 가르쳤다. 영어로 중국어 수업을 잘해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중국어 발음도 아주 좋았다. 딕션이 좋다보니 전달력 또한 좋아서 중국어가 자연스럽게 귀에 꽂혔다. 한마디로 학생이 공부할 맛 나게 하는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또한, 경기도 안성에 있는 남자고등학교에서 외국어 선생님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어서 간단한 한국말도 할 줄 알았다. 아쉽게도 한 학기를 마치고 인근 초등학교 발령을 받아 더이상 Y선생님의 수업은 들을 수 없었다. "너무 아쉬워요" 하지만 우리의 인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항상 웨이신(微信)으로 안부를 물었다. Y선생님과의 데이트 어느 날, Y선생님은 자신이 근무하는 초등학교로 초대했다..

3화: 중국에서의 주말 아침 루틴

1화에서 밝힌 일명 '콩나물 사건' 이후 집에서 가까운 쇼핑몰 지하에 위치한 마트를 이용하다가, 주말이면 차로 20여 분 거리에 있는 대형 마트에서 생필품과 식재료를 사서 냉장고에 쟁였다. 냉장고는 작은데 한국에서 장 보던 버릇을 못 고쳐 일주일치 식량을 사다 보니 냉장고는 언제나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그러다 정말 우연히 재래시장 위치를 알게 되었다. 도로 가에 주차하는 비용 5위안 따위는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먼저, 시장 입구에서 파는 참깨 빵(정확한 이름은 모름)을 너무 좋아했다. 아무런 첨가물 없이 오로지 밀가루와 약간의 소금으로만 간을 한 빵이다. 빵의 겉면에는 참깨 범벅이다. 참깨가 풍년인데 처치 곤란해서 많이 뿌렸거나, 아니면 어느 날 참깨를 쏟았는데 너무 잘 팔려서 그 뒤로 참깨 범벅을 했..

2화: 학교에서 살아남기

앞서 밝혔듯,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중국행에 몸과 마음은 항상 경직되어 있었다. 나에게 주어진 과제는 '살아야' 했고 '배워야'했다. 학교 내에선 특히 점심 시간이 가장 곤혹스러웠다. 메뉴를 읽고 말할줄 알아야 먹고살 수 있기 때문에... 밥, 밥, 밥 학생 식당에서 같은 반 유학생들을 만나면 도움을 받기도 했다. 특히 교환학생으로 온 한국 학생들의 메뉴를 따라서 주문하곤 했는데, 일주일 내내 그 메뉴만 먹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 물론 맛있었지^^ 그러다가 외국인 학생들이 먹는 음식이 맛있어 보이면 따라서 시키거나, 내 앞에서 주문하는 중국 학생의 낯선 음식을 보며 같은걸 달라고 하기도 했다. 뭐라고 말했냐고 묻는다면? 우리에겐 만국공통어 바디랭귀지가 있고, 더불어 나는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천하..

1화 - 그깟 콩나물이 뭐라고...

2015년 2월 그 당시를 되돌아보면 아들, 딸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조금 덜 힘들게 정착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루커우 공항에 내리기 전부터 긴장감과 두려움으로 심장이 멎을 것 같았는데 살다 보니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았다. 대학생이었던 아이들은 휴학을 하고 중국행에 기꺼이 동참했다. 내가 중국에 정착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물론 하루에도 몇 번씩 다투기도 했지만... 중국 발령받고 회사에서 마련해 준 집에 도착했으나, 약 한 달 전 한국에서 보낸 이삿짐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출국할 때 가지고 간 트렁크에 든 옷가지며 약간의 비상식량이 전부였다. 우리나라 아파트 35평 정도 되는 중국 사택은 특별할 것 없는 일반 아파트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중국 일반 아파트는 특..

50살 아줌마의 중국 생존기 - 프롤로그. 엄마는 50살에 중국어를 배웠다.

나이 오십에 외국에 살 수 있는 기회가 어디 흔한 일인가. 더군다나 다양한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과 함께 공부를 한다는 것은 큰 결심과 도전정신 그리고 인내력이 아니고는 그 시간들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폰에 저장했다가 용량이 많아 네이버 MYBOX로 옮겨진 사진들은 그 시절을 헛되이 보내지 않은 나를 대변해준다. "열심히 살았던 나, 칭찬해" 해외 주재원 발령받은 남편과 함께 중국에 간 건 2015년 2월 1일이었다. 중국어에 관심조차 없었던 내가 과연 그 곳에서 적응하며 살 수 있을까... 하고 처음에는 많이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호기심도 많고 도전 정신도 조금 있는 데다 배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금은 즐기기까지 하는 기질이 있다 보니 잘 헤쳐나갈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남편은 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