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소년을 위한 공연이어서 일부러 예매를 안 했는데 어제저녁 공연 예매 사이트 둘러보다가 뮤지컬 <17세> 빈좌석이 남아있어서 습관적으로 예매를 했다.
뮤지컬이나 연극은 이야기의 흐름이 있기 때문에 공연이 끝날 때까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봐야 해서 공연장 가기 전부터 긴장을 하곤 한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중, 나의 17세 때는 어땠는지 기억을 떠올려봤다.
17세.
얼른 떠오르는 일이 없었다.
있는듯 없는 듯 평범한 학생이었고 가정형편 역시 너무 가난하지도 그렇다고 부자도 아닌 소박한 서민이었다.
학창 시절 있을 법한 흔한 일탈 한번 없이 그냥 무난한 학생이었다.
나의 열일곱 살이 이렇게 무미건조했던가?
좀 더 디테일하게 생각을 해보자... 생각을...
음...
기독교학교였던 탓에 매일 아침 번호대로 돌아가며 성경 구절 읽기, 기도문, 찬송가를 모두 본인이 알아서 선택하고 기도문을 써야 했는데, 어쩌다 친한 친구들 기도문을 대신 써주는 일이 의외로 적성(?)에 아주 잘 맞았다.
기도문은 자연스럽게 국군장병 위문편지로 이어졌고 연애 편지까지 대필해주는 위험하고도 아슬아슬한 상황까지 발전했던 것 같다.
운동장 조회 시간에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 듣다가 픽픽 쓰러지는 애가 나였고, 체육시간이면 교실에 남거나 벤치에 앉아 있는 단골이었다. 코피도 자주 흘려서 늘 위험(?) 한 아이였다.
하지만 허우대가 멀쩡해서 체육대회라도 하는 날이면 반대표 선수로 뽑혀 숫자 채우는 아이가 나였고, 화장실 따라가주는 진한 우정을 과시하는 친구도 몇 명 있었다.(학창 시절 화장실 따라가 주는 친구는 찐 우정임)
평범하디 평범한 우리 집이었지만 동네 친구 집은 우리 집과 달랐던 걸로 기억한다. 시골에서 입 하나 덜자고 도시로 보낸 먼 친척 여자 아이가 그 시절 '가정부'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가사도우미가 있는 집이었는데, 가정부가 도시락 반찬으로 매일 시금치만 싸준다고 투덜대며 내 도시락 반찬을 나눠먹던 친구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17살 즈음의 기억은 또 있다.
음악 책에 있는 곡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음악 실기 평가(지금 생각해도 그 시절에 좀 과한 실기 평가 아니었나 싶음)때 피아노를 너무 잘 치는 친구가 부러워 뒤늦게 집 앞 피아노 교습소에 다녔지만 재능이 없다는 걸 스스로 판단한 후 그만뒀던... ^^



인천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 도착.
티켓을 수령하고 공연장 안으로 들어가니 빈 좌석이 많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꽉 찼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 학생들이다???

아, 기대는 주머니에 넣어두자.
웅성웅성~
웅성웅성~
학생 단체가 관객인 공연을 예전에 경험한 터라 오늘 뮤지컬 공연 도중 학생들이 어떻게 반응할 거라는 걸 이미 짐작하고도 남았다.

공연 내용
"딸이 가출했어요"
이근미 작가의 소설 <17세>를 바탕으로 만든 뮤지컬 <17세>는 딸 다혜가 가출하는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공부를 잘했던 엄마 무경은 집안 형편 때문에 공장에 취직하지만 첫사랑의 사고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다며 엄마 품에 안겨 울자 엄마는 괜찮다고 다독여준다.
무경은 결혼 후 남편의 잦은 폭력에 집을 나가게 되고 남편이 딸 다혜를 키우던 중 남편이 사망하게 되자 엄마 무경은 딸을 키우게 된다.
하지만 꼭 필요할 때 곁에 없었던 엄마에 대한 감정을 삐뚤어지게 표현하고 급기야 딸 다혜는 가출을 한다.
엄마가 딸에게 메일로 자신이 겪은 열일곱 살의 좌절과 방황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엄마와 딸은 서로를 이해하며 마음을 여는 내용이다.
공연 관람
뮤지컬은 종합예술인만큼 노래로 표현되는 부분도 많고 대사와 연기로 대부분 표현된다.
어린 무경이 공장에서 만난 첫사랑 차현과 손을 잡는 장면이 나오자 객석은 난리도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몇백 명이 동시에
"꺄~~~~악~~~~!!!!"
어떤 의미의 아우성인지 모르겠지만 너무 극에 몰입한 학생들의 반응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마치 공연의 일부인 것처럼 함께 흘러갔다.
특히 딸 다혜가 가출 후 길바닥에 침을 틱~! 뱉는 양아치와 함께 있는 장면에서는 학생들의 감정 섞인 야유가 공연장을 가득 메웠다. 그만큼 연기를 실감 나게 잘했다는 뜻이겠지?
공연 시작을, 다혜가 세상을 향해 욕을 날리는 랩으로 시작해서 무척 당황했는데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극의 흐름을 되짚어보니 어른과 학생이, 아니 엄마와 딸이 함께 보면 좋을 뮤지컬이었다.
공연장을 빠져나와 책가방을 둘러메고 삼삼오오 흩어지는 학생들.
오늘 뮤지컬 <17세>를 본 학생들은 어떤 생각을 안고 가는 걸까?
가출하지 말자?
혹은
엄마 생각?
아니면
연기를 전공해볼까?
무엇이 됐든 이 공연을 보고 가슴속에 하나라도 남는 게 있다면, 뮤지컬<17세>는 성공한 작품이다.
ps. 당신의 17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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