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출발하여 저녁밥 하기 전에 집에 도착했더니 멀리 여행 다녀온 느낌이다. 평소 오후에 두어 시간 짧게 다녀오던 때와는 사뭇 다른 날이다.
여러 곳을 기웃거린 탓에 횡설수설하며 이야기가 길어질까봐 걱정이지만 일단 [100일 걷기 챌린지]61일차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
혼밥, 혼행이라는 말이 흔해진 요즘, 조금씩 혼자서 꼼지락 거리며 혼밥과 혼행에 도전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혼자 산에 가서 혼자 밥(도시락) 먹는 일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다.(해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음)
오늘 아침엔 큰맘먹고 보온병에 뜨거운 물도 담고 비상식량(?)도 몇 가지 챙겼다. 비상식량이라고 해봐야 아이들이 먹다가 싫증 나서 안 먹는 과자와 귤 2개.
배낭에 있던 접는 우산은 무거울까봐 꺼내고 대신 물을 한 병 더 담았다. 어제 패딩에 바람막이까지 입었더니 옷이 거추장스러워 바람막이는 안 입고 가볍게(?) 짧은 패딩만 걸치고 나갔다.(설명을 길게 한 이유가 있음^^)
'등산'이라는 계획이란걸 세우고 보니 지하철 입구에서 김밥을 사는 나름의 지혜(?)까지 샘솟았다.
꼬마김밥 5개가 한팩인데 어째 너무 많다 생각이 들었지만 혹시 산에서 길 잃어버리면 남은 김밥이 생존에 결정적 도움을 줄 수도 있으니 괜찮아 보였다.
지하철에서 내려 곧바로 인천대공원 남문으로 향했다.
오늘 목적지는 관모산. 관모산 정상석 찍고 내려오기였다.
많은 정보를 종합해볼 때, 관모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무장애나눔길 쪽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해서 처음 가는 곳이니 나도 당연히 남문에서 곧바로 무장애나눔길로 올라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관모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너무너무 많았다. 심지어 무릎 관절이 안 좋거나 등산 초보인 경우는 무장애나눔길보다 더 쉽고 편한 다른 길을 선호한다는 사실!)
주말에 인천대공원에 가면 소풍 나온 사람들이 많은 반면, 평일의 인천대공원은 대부분 운동하려는 사람들이었다.
다들 부지런하다.
아직까지 단풍이 붉게 물들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더니 아직도 가을은 깊어가는 중인가 보다.
무장애나눔길로 들어서며 빨갛고 노랗게 물든 단풍에 취해 있을 때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왜 그때 일기예보를 볼 생각을 안 했는지 모르겠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메타세콰이어길을 지날 때까지도 앞으로 펼쳐질 상황은 예상하지 못하고 무장애나눔길인 데크 길을 향해 걸어갔다.
'금방 그치겠지?'
위쪽에서 사람들이 무리 지어 우르르 내려오는 반면 몇몇은 올라가고 있었다. 초행길이 아닌 듯싶은 그들을 따라 걸어가면서도 '비 오는데 이게 맞나?' 살짝 의심이 들었다.
어제 하늘 예쁘다고 칭찬해줬는데 하루아침에 배신이라니...
비 피할 곳이 없었다.
패딩이 축 쳐질 만큼 젖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쉼터로 내려왔다.
지붕이 있는 쉼터엔 이미 비를 피하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서 아무리 각을 재봐도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하는 수없이 바로 옆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화장실도 비를 피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순식간에 비가 쏟아지니 대책이 있겠는가. 일단 지붕이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들어가야지...
큰맘 먹고 혼자 산에 오는 건 처음인데... 더군다나 김밥도 있는데...
패딩은 비에 젖어서 축 쳐지고... 그나마 챙이 있는 등산 모자를 쓰고 있어서 다행이랄까.
춥다는 느낌이 들어서 배낭 안에 비상용으로 넣어둔 멀티스카프를 목에 둘렀다. 준비성 제로인 내가 배낭 안에 멀티스카프를 넣어뒀다는 게 얼마나 기특하던지^^
하지만 이내, 아침에 우산은 왜 배낭에서 꺼냈는지, 어제처럼 더운 날에 바람막이 입더니 하필 오늘 같은 날 무슨 배짱으로 바람막이를 헌신짝처럼 버렸는지 내 손목을 때리고 싶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빗방울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잠시나마 화장실에서 함께 비를 피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내려가고 혼자 온 여자분과 나 이렇게 단 둘이 남게 되었다.
그때 나는 산에 올라갈까 아니면 내려갈까로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다.
여자가 말했다.
관절 수술을 하고 5년 동안 집에만 있었단다. 이렇게 살다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씩 걷기 시작한 게 관모산.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상아산을 다닌다고 했다. 인천대공원이 워낙 넓어서 매일 서너 시간 걷는단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도 여러 갈래길이고 인천대공원 내에서도 호수길, 수목원 등 걷기 좋은 길이 너무 많단다.
봄이면 꽃이 많이 피어서 좋고 여름이면 나무가 우거져서 좋고 가을은 단풍이 예쁘고 눈 내리는 겨울은 환상적이라며 인천대공원과 관모산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이 대화가 모두 화장실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비가 거의 그치자 그는 아래로 내려가고 나는 산으로 올라갔다.
조금 올라가니 작은 평지에 각종 운동기구와 쉼터가 있었다. 쉼터에서 잠시 배낭을 내렸다. 따뜻한 차 한 잔이 너무 마시고 싶었다.
사실 비에 젖은 채로 화장실에서 비 피하고 있을 때부터 따뜻한 차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장소가 장소인 만큼 참고 있었다ㅎㅎㅎ
이미 점심시간이 지난 상태였지만 배는 고프지 않았다.
소풍 기분 내고 싶어서 김밥을 샀는데 그 시간엔 애물단지처럼 생각되어 어떻게든 빨리 처리하고 싶었다. 다음에 또 산에 갈 일이 있다면 김밥은 안 살것 같다.
3개 먹었더니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더 먹었다가는 체할 것 같았다.
남은 김밥 2개를 김밥 싼 비닐봉지에 다시 담아서 배낭 속에 욱여넣었다.
그리고 서둘러 산으로 올라갔다.
관모산 정상석만 찍고 내려오자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경험했던 '등산'은 서너 시간씩 걷고 며칠씩 몸살 앓았던 터라 등산을 싫어했었는데 관모산은 그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였다. 젖은 낙엽 때문에 미끄러질 위험은 있었지만 조심조심 관모산 정상석에 도착했다.
드디어 관모산 정상 도착!
서둘러 인증 사진만 찍고, 내려갈 때는 화장실 그녀에게서 들은 대로 걷기 좋다는 상아산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이건 무계획인 듯 무계획 아닌 무계획 같은?)
올라가는 중에 맨발 걷기를 하고 있는 두 명을 만났다.
요즘 내가 관심 있게 보는 분야라 유심히 보면서 걷고 있었더니 그중 한 분이 내게 말했다.
"맨발로 걸으면 좋은데 한 번 해봐요"
진짜 진심으로 묻고 싶다.
내 얼굴에 '나 맨발 걷기에 관심 있어요'라고 적혀있는가?
부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맨발로 산에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얼굴만 아는 사이란다.
하마터면 큰 실수할 뻔했다. ㅎㅎㅎ
여자는 30m쯤 되는 반질반질한 맨땅을 맨발로 계속 걸으면서 맨발 걷기의 효과를 나에게 주입시켰고,
남자 역시 제자리에서 맨발로 걸으며 본인이 경험한 맨발 걷기의 효과를 세뇌(?)하다시피 했다.
남자의 말은 이랬다.
" 비염 때문에 10년째 고생하고 있는데 병원에서도 못 고쳤어요. 비염 때문에 고생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몰라요. 얼마나 힘든지.
등산하면 좋아질 거라 생각하고 산악회 가입해서 등산을 몇 년째 하고 있는데 배만 나오고 살만 쪄요. 왜냐면 산에서 내려오면 고기 먹고 막걸리 마시거든요. 그러고 집에 가면 피곤하니까 바로 누워서 자요.
그러다 친구 권유로 맨발 걷기 시작했는데 한 달 정도 지나니까 비염이 다 나았어요. 거짓말 같죠?"
여자는 남자의 말에 동의하며 나에게 당장 맨발 걷기를 하라며 설득도 하고 으름장도 놨다.
내가 머뭇거리자 여자는 체념한 듯
"아무리 좋다고 얘기해도 본인이 싫으면 어쩔 수 없죠"
라며 맨발 걷기에 열중했다.
맨발 걷기를 체험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할 수 없는 나름의 사정이 있다.
며칠 전 전기포트에 있는 뜨거운 물을 찻잔에 따르다가 뜨거운 물 한 방울이 발등에 떨어져서 화상을 입었다. 겨우 한 방울이지만 며칠째 화상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이고 있는 중이다.
아직 낫지 않았는데 흙을 밟았다가 파상풍이라도 걸리면 맨발 걷기를 혐오할 수도 있을까 봐... 아, 너무 나갔나? ㅎㅎ
암튼 오늘은 날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상아산으로 내려가려고 하니, 여자는 동물원 쪽으로 내려가란다. 동물원으로 내려가는 길이 훨씬 더 좋단다. ㅎㅎㅎ
나야 뭐 정해진 게 없으니 어디든 괜찮았다. 동물원 쪽에서 올라오는 길이 있다는 얘기를 어디서 주워들은 적이 있어서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참이었는데 잘됐다 싶었다.(이렇게 팔랑귀임 ^^)
여자가 알려준 길로 걷다가 알게 되었다.
그 길은 맨발 걷기 하는 사람들의 필수 코스 같은 길이라는 것을^^
"왜 신발 신고 걸어요?"
그 길을 내려가는 동안 여러 번 들은 말이다.
산에서... 신발 신고 걷고 있는데... 다짜고짜... 왜 신발 신고 걷냐고 묻다니... ㅎㅎㅎ
내려오다 보니 동물원 입구가 나왔다. 내친김에 동물원 구경하러 들어갔다. 동물 종류는 많지 않았지만 아이들에게는 좋은 학습 장소가 되어 보였다.
잠깐 동물원 구경을 마치고 수목원이 있는 동문으로 향했다.
동문에 수목원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었는데 일단 입구만 구경하고 가기로 했다. 참, 동문엔 편의점이 있다는 사실도 매우 중요하다.
비는 그치고 햇빛이 비쳤지만 바람에서 찬 기운이 느껴졌다. 편의점에서 따뜻한 뭔가를 사 먹고 싶었다.
아... 그러나 못 샀다.
한강 라면 팔던데... 어떻게 끓이는지를 몰라서 못 샀다.
"그게 뭐라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 신문물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 같은 것도 있다. 어른들이 키오스크 사용을 못 하는 이유도 그렇다. 조심스럽게 물어봤는데 퉁명스러운 답변을 들으면 죄지은 것도 아닌데 기죽게 되는 것도 신문물을 얼른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암튼... 한강 라면은 건너뛰고 편의점 바로 뒤에 있는 수목원으로 향했다.
"이렇게 예쁜 곳을 몰랐다니..."
오로지 사람의 정성스러운 손길로 가꿔진 수목원. 울창한 산과는 다른 아기자기한 멋이 있었다.
적당히 둘러보고 나와야 하는데 발걸음은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겠지만 지도를 보니 수목원 규모가 상당히 커서 한 바퀴 돌다가는 내 발목이 부러질 것 같았다.
다행히 장미원 쪽으로 나가는 출입구가 있었다. 봄부터 장미꽃이 만발했을 텐데 다 지고 난 다음에 알게 되다니... 무척 아쉬웠다.
다음에 수목원 한 바퀴 돌고 또 그다음엔 호수 한 바퀴 돌아야지... 기대된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배낭만 던져놓고 마스크 끼고 모자 쓴 채 쌀을 씻었다. 산삼 캐왔냐고 묻는데 그런 싱거운 질문에 답변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휘리릭 된장찌개 끓이고 고기 굽고...
아, 남은 김밥 2개는 저녁 식탁 위에 올려놨는데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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