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겨울대로의 멋이 있을 텐데 자꾸만 가을 속에 머물고 싶어 진다.
자유분방하게 휘어진 소나무와 저물어가는 단풍 구경하러 약 두 달여 만에 전등사에 다시 갔다.
지난번과 같이 전등사 동문으로 올라갔다.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다. 아니, 한층 더 깊어진 모습이다.
여름에도 예쁘더니 가을이 되니 입구에서부터 발그레한 모습으로 반겨준다.
전등사는 가을에 한층 더 고즈넉한 기품이 있는 곳이다.
지난번엔 정족산성 오른쪽으로 올라갔었는데 올라갔을 때의 느낌이 좋아 오늘도 올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에너지 고갈 상태로 부처님을 뵙는 것은 예의가 아닌 듯하여 바로 전등사로 올라갔다.
"당신의 동전이 어려운 이웃에게 큰 힘이 됩니다"
지난번 방문했을 때 동전이 없어서 '다음에 다시 올 땐 동전 챙겨 와야지' 했었는데 드디어 그 약속을 지키게 되었다.(나에게도 큰 힘이 되어주길 바라며 퐁당~)
약간 추운 날씨였지만 전등사의 늦가을을 즐기려는 관광객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주차장에서부터 자리가 없을 정도로 차량이 많았으니 전등사는 초파일처럼 북적거렸다.
날짐승에게 유용한 먹거리가 되어줄 까치밥마저도 가을 그림 그 자체다. 한두 개 남겨뒀으면 야박했을 텐데 제법 많은 양이 남아있다.
꼭 사찰이 아니어도 도시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이라 까치밥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감나무 아래에서 저마다 휴대폰을 들고 사진 찍기 바빴다.
전등사에는 못 보던 손님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어린왕자. 우리가 아는 생텍쥐베리의 그 어린왕자다.
전혀 모르고 갔는데 뜻밖의 만남이었다.
<어린왕자와 함께 하는 전등사의 가을>展
조각가 이영섭의 작품으로 10월 22일~ 11월 13일까지 전등사 전역에서 작품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사찰과 너무 잘 어울려서, 처음 전등사에 갔었다면 오해를 할 정도였다.
플래카드에 적힌 내용을 보고 그때서야 주위를 둘러보고서 곳곳에 어린왕자 조각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것을 알았다.
이영섭 조각가의 발굴 기법으로 탄생한 작품 20여 점을 도량 곳곳에 전시하고 있다.
작가는 세계 최초 '발굴 조각'으로 조각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다소 생소한 '발굴 조각' 기법은 기존 조각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작업 방식으로 평가받고 있다.
흙 마당에 밑그림을 그리고 흙은 파낸 뒤 그 속에 혼합재료와 유리 원석, 보석, 자개, 도자기 파편 등의 오브제를 넣고 흙을 덮는다. 시간이 지난 뒤 흙에서 작품을 꺼내어 발굴하는 작업이다.
이 전시회는 이영섭 작가의 생텍쥐베리의 어린왕자 외에도 현대적 감각으로 표현한 관세음보살, 의자, 천사 등 20여 점이 전시된다. - 출처: 불교닷컴
20여 점의 작품을 모두 찾지 못했다.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의외의 장소에서 찾았는데 카페 '죽림다원' 입구에 있는 작품은 오래전부터 원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보고도 그냥 지나쳤다가 혹시? 하면서 다시 되돌아 서서 알아보게 되었다.
전등사에 갔으면 죽림다원은 무조건 가야 한다. 녹음이 우거진 여름날도 예쁘더니 가을이 되니 더더욱 예쁜 모습이다.
창가에 매달린 곶감은 깊어가는 가을 풍경을 한층 더해주고 있다.
사랑방 같은 좌식 테이블이 있는 곳에 앉아서 통창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면 세상 부러울 것 없어 보인다.
하지만 좌식 테이블은 이미 만원^^
전통 찻집답게 대추탕, 쌍화탕, 생강 레몬차와 주전부리인 약과, 연꿀빵이 있다. 커피 종류는 아메리카노 1종만 가능.
매일 마시는 커피는 잠시 접어두고 대추탕 한 잔에 건강과 여유로움까지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
지난번에는 전등사 동문으로 들어갔다가 나올 때도 동문으로 나왔었는데, 오늘은 동문으로 들어가서 남문으로 나왔다. 정족산성에 올라갔다면 더 좋았겠지만 풍성해진 가을을 느끼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전등사는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곳이지만 보면 볼수록 새로운 모습이 많아 또 가고 싶어지는 곳이다.
〓사람 사는 이야기
죽림다원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외국인 남편과 한국인 아내로 보이는 둘이 들어왔다. 60대 후반쯤 되어 보였다.
외국인 남편의 첫인상은 말랐지만 맑은 영혼을 소유하고 있을 것만 같은 철학자 느낌이었고, 아내 역시 꾸민 기색 하나 없이 수더분한 모습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심지가 깊어 보였다.
죽림다원 안에서 차를 마셨는지 차를 사서 밖으로 나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차를 마시고 남문으로 내려오는 길에 또 만났다.
독일에서 왔단다.
굳이 개인사를 물어볼 필요는 없었지만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어머니가 파독 간호사였다는 이야기, 내일 출국한다는 이야기 등등.
그러다가 '한국 사람들은 외국인 특히 백인에게만 친절하다'는 말을 내게 했다.
독일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데 한국에서 일하는 아시아인들을 초청하게 되었단다. (그 과정을 내게 설명했는데 흘려들어서 기억이 안 난다 ㅠㅠ)
그 아시아인들 하는 말이, "한국인은 동남아인들에게 굉장히 불친절하다"고 했단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열심히 포장을 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영어를 잘하기 때문에 백인들이 영어로 물어보면 잘 알려줬을 거예요. 아마 백인은 영어를 사용한다는 전제하에 그랬지 싶은데요, 보는 사람에 따라 그걸 '친절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동남아 사람들은 영어를 할 줄 아는지를 모르니까 섣불리 나서지 못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라는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모를 설명으로 우리나라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을 조금이라도 바꿔보려고 변명을 했다.
막 변명을 늘어놓고 있으면서도 나 스스로 현타가 왔음을 느꼈다.
내가 그 부부를 낯설게 생각하지 않고 말 섞는 것에 대해서도 그들은 '백인이라서 친절하다'로 생각하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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