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소일각치천금(春宵一刻値千金)

인천수목원에서 만난 히어리, 수양 매화, 풍년화, 복수초, 노루귀, 산수유, 올괴불나무

문쌤 2023. 3. 21. 23:50

인천대공원 남문에서 호수로 가는 길 양쪽에 있는 벚나무에 드디어 꽃망울이 맺혔다. 이제 곧 활짝 피어 온 동네를 환하게 밝힐 날이 머지않았다.
 
이 길을 걸으며 딱 어울리는 글이 생각났다.
 
"벚꽃이 피기를 기다리다 문득 당신께 편지 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윤대녕의 <상춘곡> 첫 문장이다.
 
벚꽃이 필 때쯤 만나자고 하면 언제 가야 할까?
여자가 4월 말쯤 벚꽃이 피면 그때 다시 만나자고 했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자신이 없어서 여자의 고향인 선운사로 간 화자.
 
올해도 봄은, 벚꽃은 이렇게 <상춘곡>으로 시작한다.
 
 

한반도 희귀 식물 세밀화 전시회

인천수목원 산림전시관은 처음 가보는 곳이다.
세밀화로 그려진 두꺼운 식물도감을 갖고 있는데 전시된 작품이 궁금해 자연스럽게 전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밀화로 그린 식물도감>의 조금 더 큰 버전이다.

 
 

인천수목원 

오늘은 벚꽃길 남문에서 가까운 장미문으로 곧장 갔다. 체력이 남아있을 때 먼저 꽃들의 안부를 묻고 그 이후에 남는 체력으로 공원을 걸을 생각이었다.
장미원 한가운데 있는 분수는 벌써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다. 춘분인 오늘 유난히 더운 걸 생각하면 오히려 시원한 느낌이었다.
 

지난주 방문했을 때 히어리 앞에서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되는 바람에 사진을 못 찍어 아쉬웠는데 오늘 좀 더 수줍게 핀 히어리를 만났다. 
 
한때 닉네임이 '히어리'인 걸 생각하면 전혀 무관하지 않은 꽃이다. 

정호승 시인은 연노랑색에서 '외로움'이 느껴진다며 그 색감에서 오는 느낌을 詩( '수선화에게')로 그려냈다. 
그런데 산수유, 만리화, 영춘화, 생강나무 등 봄에 피는 꽃 대부분이 노란색인걸 보면 봄은 외로움이었던 걸까?

히어리야말로 그 어떤 노란 봄꽃보다 더 '쓸쓸한 외로움'을 닮았다.
 
 

늘어뜨린 가지가 물 위에 비친 산수유. 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초점이 빗나갔다. 
작은 화면에 비친 사물이 사실은 눈에 잘 안 보이는 상태에서 셔터를 눌렀는데, 아~ 이제 보니 돋보기안경이 필요하구나. 흐음... 이러면 점점 소심해지는데...
 

멀리서 보면 벚꽃처럼 보이지만 전혀 닮지 않았다. 지난주보다 조금 더 활짝 핀 수양 매화다. 마치 희고 고운 손을 길게 뻗은 무용수의 몸짓 같다. 
수양 매화 앞에 작은 벤치가 있다면 그 자리에 앉아 오래도록 매화와 무언의 대화도 가능할 것 같았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가지마다 은은한 향기를 흩날리니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수목원엔 산수유가 지천으로 피었다. 계속 봄꽃이 피기 때문에 이렇게 사방에 핀 산수유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5월이면 사랑하게 될 꽃개오동.
오늘도 눈도장만 찍고 간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꽃이 핀 지 2주 만에 벌써 스러진 올괴불나무. 인천수목원에 딱 한 그루 있다.
꽃이 피었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한 채 지나가기 쉽다.
 
아쉬운 마음에 그나마 생기 있어 보이는 꽃송이 붙잡고 있으니, 꽃구경 하던 사람들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무슨 꽃이냐"
 
"지금 핀 게 맞냐"
 
아는 대로 알려주니
"부끄러워서 잠깐 피었다가 사라졌다"며 아쉬움을 에둘러 표현했다.
 
괄괄한 외모와 달리 생각지도 못한 표현이 놀라웠다. 꽃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시인이 되는가 보다.
올해는 올괴물나무와 닮은 꽃이 그려진 원피스를 좀 더 일찍 꺼내야겠다.
 
 

땅에 달라붙어 겨우 꽃망울만 맺혀있을때, 아픈 허리 숙여가며 영접하던 때가 불과 보름 전인데 하루가 다르게 씩씩하게 자라는 복수초와 노루귀.
찬란한 첫 만남의 순간을 잊지 못해 여전히 그 주위를 맴돌고 있다.
 

복수초와 노루귀의 영광을 기억하기 위해 오늘도 꽃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카메라에 담는다.
 

토투어스 드래곤이 인기가 많아 매실나무 주변엔 카메라가 줄을 섰다.
사진 한 장 찍기 어려울 정도로 좁은 데크길엔 토투어스 드래곤의 모습을 담기위한 사람들로 북적이고,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어떻게 찍어야 고고한 모습을 온전히 담을 수 있을까?
다들 이리저리 자리 옮기며 부지런히 셔터를 누르고, 나는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수목원 마감 시간이 다 되었으니 퇴장해야 한다는 안내를 받았다. 
한 그루 나무에서 두 가지 색을 띤 풍년화.
딱 한 장 찍고 걸음을 재촉했다.
 
지금 인천대공원 수목원엔 봄꽃대전이 한창 준비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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