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파일 지난 전등사는 언제나처럼 고요하다.
오늘도 역시나 동문으로 올라갔다.
전등사의 상징과도 같은 동문을 통과하면 수령 350년 된 느티나무가 반겨준다.
느티나무 오른쪽 정족산성으로 향하는 등산로 표지판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전등사에 갈 때마다 맑은 날이 없었는데 오늘도 예외는 아니다. 한바탕 쏟아질 듯 먹구름 이동이 심상치 않다.
늘 덜렁대는 데다 준비성 제로인데, 접는 우산을 챙겼다는 든든함에 비 따위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TMI고백 타임...
고백하건대, 100일 지나는 동안 제법 준비성이 갖춰진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덜렁대는 일상이다.
등산로에 오르자마자 까맣게 익어가는 오디를 만났다.
요즘 어딜 가나 6월에 익어가는 열매가 반겨주는 때이다.
땅에 떨어진 오디가 아깝지만 손에 닿는 위치에도 까맣게 익은 오디는 얼마든지 있다.
6월의 마알간 햇살 먹고 익어가니 얼마나 맛있겠는가.
더군다나 사찰 안에서 조용히 익어가는 오디라니.
몇 개 따먹었다고 혼날까?
아마도???
양심껏(?) 따먹고 발걸음을 옮기자마자 이번엔 산딸기가 빨간 옷을 입고 유혹하고 있다.
정말 값을 제대로 치러야 할 것 같다.
한참 오르다 뒤를 돌아보니 먹구름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정족산성 한 바퀴 걷기 전에 쏟아질 모양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에서 바라본 온수리 마을.
정족산성 오를 때마다 한 번도 맑은 날이 없었지만 이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백만 불짜리여서 그 어떤 날씨와도 상관없다.
맑으면 맑은 대로, 눈이 오면 눈이 내린 대로, 비가 오면 비가 내리는 대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보여주는 곳이다.
정족산성 한 바퀴 걷기 때문에 이정표가 없어도 되지만, 걷다가 만나는 이정표는 언제나 반가운 친구 같다.
잘 걷고 있는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서 의지가 된달까?
동문에서 정족산성 오르자마자 만나게 되는 계단이 애피타이저였다면, 저 위에 보이는 계단은 본격적인 마의 구간이다.
종아리를 뒤에서 잡아당기는 듯해서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점점 걷는 속도가 느려지는 곳이기도 하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다지 않았나.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다 보면 어느새 계단 끝에 다다르게 된다.
불행이 찾아왔을 때서야
무심하게 지나갔던 행복을 알게 됩니다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당신이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당신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그건 당신이 내 마음에 있기 때문일 겁니다
소유하고 있는 것에 감사하고
욕심을 버릴 때만이
세상이 내 가슴으로 들어오고 행복도 옵니다
온 세상이 어둠뿐이라면 그건 어둠이 아니듯이
주위가 온통 행복이라면
그것 또한 행복이 아닙니다.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쓰지 마십시오
그건 불행의 시작이 됩니다
내 어깨에 불행과 행복을 짊어지고
불행만 생각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희망은 절망에서 찾게 됩니다
앞으론 행복만을 생각하십시오.
몇 해 전 전시회에서 만난 김원근 시인의 <행복이란> 詩의 일부분이다.
평범하게 흐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이 얼마나 행복한지는 불행이 찾아왔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지 않나.
홀로 걷다 보면 머릿속은 제법 인생의 단맛 쓴맛을 경험한 어설픈 결론에 도달하는 자만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비 내리는 날, 100일 걷기 50일 되던 그날, 스님으로부터 2시간 동안 '말씀' 들었던 그때 그 장소에 도착했다.
정족산성에 오른 뿌듯함을 만끽할 뿐이었는데, 짐작으로 괜한 걱정을 사서 하신 스님 때문에 혹시 오늘도 만나는 거 아닐까 싶어 잠시도 쉬지 않고 빠르게 걸었다.
마음에 여유가 없다 보니 까마득해 보인다.
분명 이미 걸었던 길인데 낯설게 다가오는 건 또 무슨 조화일까?
모심기를 끝낸 넓은 논은 주변 초록과 함께 그라데이션을 그리며 분주히 6월을 지나고 있다.
오르막에선 숨 고르기가 필요하지만 푹신한 잔디 위를 걸을 땐 발걸음마저 가벼워 자꾸 빨리 걷게 된다.
역사와 상관없이 정족산성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예쁜 길이다.
남문을 향해 내려가는데 이제 막 출발한 두 분을 만났다.
남문에서 불과 100미터도 안 되는데, 시작부터 계단이라 숨이 가쁜지 언제 다녀오냐며 걱정스러워했다.
"몇 시에 출발했느냐" , "시간이 얼마나 걸렸느냐"
이것저것 물어오셨다.
"걷기 좋은 길이어서 금방 다녀오실 수 있을 거예요"
나의 대답이 위로가 되었을까?
왁자지껄 학생들의 활기찬 목소리는 남문을 빠져나가고, 나는 동문을 향해 계속 걸었다.
다시 오르막 길이다.
인생에도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으면 다시 오르막이 있다는데...
나의 지난 한 해는 지하 30층을 뚫는 내리막이었으니 이제 오르막인 건가?
걷기 50일째 되는 날 돌탑 사이에 소원지를 숨겨놨었다.
100일째 되는 날 다시 정족산성에 올라 꺼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
혹시 내가 장소를 잘 못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그날 찍은 사진을 확인했는데 이곳이 확실하다.
바람에 날아갔거나 누군가 꺼냈거나... 그도 아니면 하늘로 발송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꽤 먼 거리처럼 느껴지지만 1시간이면 충분히 다녀올만하다.
마음의 위로가 필요할 때 걷기 좋은 정족산성이다.
정족산성 걷기를 마치고 무설전 위에 외롭게 앉아 있는 어린왕자를 만날 시간이다.
"만약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초파일 화려한 전등사는 '한여름밤의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고요하다.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와 6월의 햇살 받으며 시간과 시간이 더해진 축복같은 하루가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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