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요가가 12시에 끝나자 시간 활용이 애매해졌다.
그래서 오후 느지막이 도서관에 갔다.
[100일 걷기 챌린지]도 끝난 후라서 운전하고 가거나 가까운 도서관으로 갈 수도 있지만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도서관까지 걸어서 갔다.
도서관에 들어서자마자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 청구기호를 출력하고 도서를 찾는데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 원하는 책을 바로 찾을 때, 이럴 때 기분이 좋다. (그러나 이것은 운수좋은 날? ^^)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택배로 왔다>와 일반 규격에서 벗어나 눈에 띈 이원규 시인의 <그대 불면의 눈꺼풀이여>도 함께 들고 도서관 자리를 찾았다.
나의 아지트 같은 장소는 이미 만석이고 딱딱한 책상과 의자가 있는 곳도 이미 젊은 사람들의 독서실이 되었다.
다행히 맨 구석 창가 자리가 비어있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롱패딩을 입고 목도리를 두른 채 걸어서 도서관에 도착했더니 더워서 땀이 났다.
롱패딩을 벗으려고 지퍼 바깥에 있는 찍찍이를 조.심.스.럽.게 떼어냈는데
찌~지~~직~~~
도서관 안에 찍찍이 떼어내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주변에 앉아 공부하는 학생들이 인상 쓰는 것처럼 느껴져 쫄았다.
패딩에 달린 찍찍이는 총 4개. 이제 겨우 하나 떼어냈는데 나머지 3개를 떼어낸 후엔 지퍼를 내려야 한다.
찍찍이를 떼어낼까말까 짧게 고민을 했다.
결론은, 본의아니게 민폐가 될 것 같아 패딩은 그대로 입고 있는 걸로~.
이번엔 콧물이 문제다.
평소 다른 가방엔 깨끗이 빨아서 다림질까지 마친 잘 접힌 손수건을 항상 가지고 다니는데 도서관 전용 에코백엔 손수건이 없다.
훌쩍 거리는 게 주변 학생들에게 거슬릴 것 같아 화장실에 다녀온 후 다시 자리에 앉아 책을 펼쳤다.
아... 그제야 왜 이 좋은 자리가 비었는지 알았다. 햇살이 너무 강하다. 도로를 접한 창가 자리다 보니 차량 소음도 꽤나 가깝게 들린다.
저들은 인생을 건 시험을 준비할 테고 나는 도서관에 놀러 간 것이니 상관없다.
2023년의 계획 중 하나는 바로 '열심히 살지 말자'인데, 나의 계획과 딱 맞는 책을 발견했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하완 지음>
전에 한번 읽은 적 있는데 새로운 계획도 짰으니 집에 가서 다시 읽으며 열심히 살지 않을 계획에 초석을 깔기로 했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수도 있으므로...
바로 옆 칸에서 눈에 띄는 책을 발견했다.
<사진가의 기억법/김규형>
책 표지에 적힌 글이 책을 놓지 못하게 한다.
"영원한 것은 없지만 오래 간직하는 방법은 있다.
손에 사진기가 들려있다면 당신은 이미 그 방법 하나를 알고 있는 셈이다"
시간이 제법 지났다.
대출할 도서를 챙겨 서둘러 안내데스크로 갔다.
'도서 대출 카드가 어디 있더라?'
주머니를 뒤졌다.
없다.
가방을 뒤졌다.
없다.
아놔~!!!
갑자기 머리가 띵~
멘붕이 왔다.
없는 고혈압이 생기는 것 같다.
안내데스크에 가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좀 전에 도서 반납했는데 그 카드 번호로 오늘 대출 가능할까요?"
돌아온 대답은 칼 같다.
"안 돼요"
암요 암요~ 규칙을 지켜야지요...
도서관에 걸어갈 때까지만 해도 제법 먼 거리에 있는 도서관을 걸어서 간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게 문제가 될 줄이야...
저녁밥 할 시간이 되었는데 다시 왔다 갔다 할 여유가 없었다.
할 수 없다.
대출하려고 했던 책들은 눈물을 머금고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고 빈 에코백만 들고 나왔다.
책이 금방 찾아지더라니...
집에 돌아와 보니 도서 대출 카드는 거실 테이블에 얌전히 있었다.
'그래, 너는 잘못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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