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곳만 다시 가는 일명 '돌려막기' 중이다.
'돌려막기'도 무작정 가는 게 아니라 한번 가 본 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장소를 다시 가게 된다.
지난가을에 갔었던 서울 구로구에 위치한 푸른수목원과 항동 철길을 다녀왔다.(3월31일)
철길을 걷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고 넓은 수목원의 다양한 식물을 보며 걷는 것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을의 느낌과 봄의 느낌이 달라서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항동 철길
항동 철길 이야기-
대한민국 근현대 산업 부흥의 기반이었던 오류선이 '항동 철길'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오류역에서 부천 옥길동을 잇는 4,5km의 오류동선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료회사인 경기화학공업 회사가 부천시 옥길동에 공장을 지으면서 원료와 생산품을 운송하기 위해 1957년 착공, 1959년에 준공한 단선철도다.
오류동선은 삼천리 연탄, 대원강업, 일신제강(동부제강) 등의 화물수송을 담당했으며 전성기에는 하루에 여러 번씩 화물열차가 운행되던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흔적이다.
현재는 경기화학공업의 폐쇄로 화물수송 열차 운행은 중단되었고 군수품을 수송하는 철로로 이용되고 있다.
오늘날 항동 철길은 시민들에게 힐링의 장소, 사진작가들의 출사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회자되며 시민들에게 추억과 낭만을 선사하고 있다.
항동 철길에도 봄꽃이 내려왔다.
철길 걷는데 너무 낭만적이다. 마치 영화 한 편 찍어야 할 것 같은...
느리게 걸으며 발 아래에 있는 작은 광대나물에게도 한 번씩 눈맞춤.
항동1 차단기가 있는 곳이 푸른수목원 주 출입구인데 철길을 걷다 보면 자연스레 주 출입구와 멀어진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조금 걷다 보면 푸른수목원 온실 쪽으로 들어가는 작은 출입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푸른수목원을 한 바퀴 돌다 보면 어디서든 자연스럽게 수목원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철길에서 멀어지더라도 크게 상관없다.
한번 지나온 길은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특히 인생에 있어서는 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으로 미칠 것 같은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 잠길수록 내 영혼은 더욱더 피폐해져 감을 알기에 이젠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철길 걷다 만난 조팝나무.
이름이 비슷해서 이팝나무와 구분을 못했는데 조금 관심을 갖고 보니 아주 다르게 생긴 걸 그동안 대충 보고 이름을 막 부른 것 같다.
탱자나무 꽃과도 비슷하게 생겼지만 가지 생김새로 보나 꽃모양으로 보나 지금은 확실하게 구분이 가능하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게 맞다^^
'위로가 필요한 순간'
'힘들 땐 쉬어가세요'
철길에 새겨진 글귀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글귀다.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왼쪽 수목원 온실 쪽으로 입장했다. (수목원 입장료 무료)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구로 올레길' 안내도.
어딜 가든 '올레길' '둘레길' 등의 이름을 단 걷기 좋은 길이 있는데 이곳에도 걷기 좋은 '구레 올레길'이 있다.
하천형 10.5km, 도심형 7.5km, 삼림형 7.5km 등 3개 구간으로 총 28.5km로 구성되어 있다.
체력이 좋아지고 용기도 충전한다면 언젠가는 도전해 보겠지? ^^
푸른수목원 온실
푸른수목원 온실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은 포르테아과의 뱅크시아.
호주에서 자생하며 5~10m 높이까지 자란다. 산불 친화적인 생존 구조를 갖추고 있어서 산불이 나면 딱딱한 씨앗 껍질이 벗겨져 씨앗이 흩어진다. 산불로 모든 게 폐허가 된 곳의 동물과 곤충들에게 꿀을 제공해 주는 고마운 나무이다.
살짝 만져봤는데 수세미처럼 거칠고, 수술은 바늘처럼 단단해서 조금 과장하자면 실을 꿰어도 될 정도다.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 기특한 뱅크시아.
봄부터 가을까지 계속 꽃이 피는 스코파리움 호주 매화.
이름에서처럼 호주와 뉴질랜드 원산으로 3m 정도의 높이까지 자란다. 잎과 가지에서 오일을 추출하며 '마누카'라고도 부른다.
온실을 걸으면서도 몇 가지 식물 외에 크게 와닿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생각해 보니 온실보다 봄햇살 잔뜩 머금고 자란 꽃과 나무들이 수목원엔 넘쳐나기 때문이다.
온실은 후다닥 보고 얼른 밖으로 나왔다.
푸른수목원
오늘도 어김없이 할미꽃과의 조우^^
붉은 꽃망울을 머금은 명자나무.
꽃망울을 모두 터트리면 또 한 번 화려한 꽃잔치가 될 것 같다.
영춘화(迎春花) - '봄을 알리는 꽃'
봄에 피는 노란색 꽃은 모두 개나리인 줄 알았다가 지금은 영춘화, 만리화, 개나리를 구분할 줄 알게 되었다.
특히 영춘화는 일명 '어사화'라고도 불린다.
조선시대 장원급제한 선비의 모자에 꽂아주던 꽃이 바로 영춘화(종이로 만든 영춘화를 꽂아줬다함)라고 하니 영춘화가 달리 보인다.
'서산유기방가옥'에 언제쯤 가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지금은 조금 시들해졌다.
서산유기방가옥에 만발한 수선화와 느낌은 다르겠지만 며칠새 수선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 듯하다.
푸른수목원에도 종류별로 다양한 수선화가 활짝 피었다.
목필다운 모습을 제대로 갖췄다.
덜 핀 목련을 보면 붓이 생각나고 캘리그라피 수업할 때 붓을 잡고 있으면 목련이 생각나서 혼자 웃는다.
햇빛이 걸어오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이 느낌을 잘 표현한 詩가 있다.
길을 걷는데
햇빛이 이마를 툭 건드린다
봄이야
그 말을 하나 하려고
수백 광년을 달려온 빛 하나가
내 이마를 거드리며 떨어진 것이다.
나무 한 잎 피우려고
잠든 꽃잎의 눈꺼풀 깨우려고
지상에 내려오는 햇빛들
나에게 사명을 다하며 떨어진 햇빛을 보다가
문득 나는 이 세상의 모든 햇빛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강물에게 나뭇잎에게 세상의 모든 플랑크톤들에게
말을 걸며 내려온다는 것을 알았다.
반짝이며 날아가는 물방울들
초록으로 빨강으로 답하는 풀잎들 꽃들
눈부심으로 가득 차 서로 통하고 있었다.
봄이야
라고 말하며 떨어지는 햇빛에 귀를 기울여 본다
그의 소리를 듣고 푸른 귀 하나가
땅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햇빛이 말을 걸다/ 詩 권대웅
지금 푸른수목원엔 봄이 쏟아지는 중이다.
봄이 전해주는 꽃편지를 받지 않는다면 내내 후회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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