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형 아줌마의 일상 이야기]

진심을 다해 걷는다, 인천 강화 정족산성

문쌤 2023. 4. 20. 23:58

갑자기 겨울 사진을?

작년 [100일 걷기 챌린지] 100일째 되는 날 걸었던 정족산성의 추억을 잠시 소환했다.

[100일 걷기 챌린지] 시작과 끝을 전등사에서 했던 탓에 특별한 추억이 있는 곳이다.

 

 

 

[100일 걷기 챌린지]100일차. 다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이브에 전등사에 가다

#1. 예매한 공연 취소 - 리처드 용재 오닐 올해 63세 정도 되는 A는 나보다 더 공연 보는 걸 좋아한다. 특히 피아니스트 손열음을 좋아해 그의 공연이 있을 땐 백 배 더 즐기기 위해 공연 한 달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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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에 가겠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포장해서 글을 쓰고 있다 ^^

 

전등사 올라가는 길.

사찰이 대부분 비슷한 고즈넉한 분위기지만 전등사 올라가는 이 길에 반했다. 

처음부터 느낌이 좋았던 탓이다. 

초파일이 다가오니 오색 연등이 길을 밝히고 있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전등사 동문으로 입장했다.

 

매표를 한 후 동문을 통과하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느낌이어서 참 좋아한다. 실제로 전등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틀린 말은 아니다.

동문을 통과하자마자 바로 전등사로 가지 않고 정족산성 한 바퀴 걷기로 했다. 지난겨울 눈이 많이 쌓여 미완성으로 남은 정족산성 걷기를 오늘은 기필코(?) 완성하기 위함이다.

 

시작부터 아름다운 오르막길이다.

잔뜩 흐리더니 정족산성에 발을 옮기자마자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도 날씨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천천히 걸으며 쉬어갈겸 뒤돌아 본 이 풍경을 아주 좋아한다.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린 대로, 오늘처럼 흐린 날이면 흐린 대로 운치가 있는 곳이다.

 

정족산성 오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저기 끝나는 것처럼 보이는 지점까지 계속 오르막이다.

폐활량을 시험하기 좋은 길이다.

 

온수리 마을이 눈앞에 펼쳐졌다. 오르막을 다 오른 후 잠시 숨을 고르며 마을을 바라볼 때 '힐링'이라는 단어를 붙이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장소다.

 

한숨 돌렸으니 다시 걸어보자.

 

미스트처럼 비가 내려서 우산을 쓰기 애매해 그냥 안 쓰고 걸었다. 백팩에 넣어둔 카메라는 꺼내지 않고 휴대폰으로만 사진을 찍으며 자유롭게 걷기로 했다.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느낌이다. 

우산은 별 의미가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추위가 느껴져 적당한 곳에서 패딩을 껴입을 생각이었다.

 

 

삼랑성 정상으로 가는 표지판을 따라 계속 걸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오르막길이다.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걸었다.

 

드디어 삼랑성 정상에 도착~!!!

 

마을은 안개에 파묻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정상에 도착했으니 잠깐 쉬며 간식도 먹고 옷도 껴입기로 했다.

간식을 먹고 싶은 생각보다는 딱히 뭘 하기가 애매해서 일단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냈다.

 

바나나 우유와 초코바.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꽂아 한 모금 마시며 유튜브에서 음악을 찾아 에어팟 없이 들었다.

 

안개와 음악이 흐르는 산성 정상에서의 휴식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낭만적이었다. 조금 억지스럽지만 [하루 만보 걷기] 50일 기념은 화려하게 차려놓은 밥상처럼 이 공간과 시간만이 만들어 낼 수 있을만큼 특별했다.

 

혼자 분위기에 취해서 다시 우유 한 모금 마시려는 그때!!!

안개 속에서 스님 한 분이 걸어오고 계셨다.

 

입에 물던 빨대를 얼른 빼고 일어나서 합장을 했다.

커다란 검정색 우산을 쓴 스님도 합장하며 다가오셨다. 

우유는 빨대를 꽂았으니 드릴 수 없어 유일한 간식을 드렸다.

 

소탈한 성품이신지 내가 드린 간식을 드신 스님은 나를 살피는 눈치셨다. 

그도 그럴 것이, 비오는 날(안개비) 혼자서 정족산성을 걷고 있으니 나의 속을 알리 없는 스님은 걱정스러운 듯 '말씀'을 해주셨다.

법회에서나 들을 수 있는 말씀 내용은, 내가 근심 걱정이 많아서 비오는 날 이러는 것인가 짐작하셨는지 마음속의 고통이나 미움, 슬픔을 쌓아놓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 거 아니라고 했더니, 돈 문제로 인한 욕심이 빚어낸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또 긴긴 말씀을 해주셨다. 

'스님, 전혀 그런 거 아니예요. 다만, 저 빗속에 있는 바나나 우유가 걱정입니다만...'

 

비가 조금씩 굵어져 스님과의 대화 중간에 우산을 꺼냈지만 바나나 우유는 어쩌지 못했다.

 

스님은 '마음이 괴로운 중생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셨는지 좋은 말씀을 계속해주셨다.

하지만 선한 스님의 생각과 달리 고질병인 허리가 아파오고 계속 서있었더니 다리도 아파서 가끔 제자리걸음을 하기도 했다.

대화의 주제는 광범위하게 넓어졌다.

전등사의 역사를 시작으로 정치 이야기, 전국 사찰 비구와 비구니의 비율, 수행하기 좋은 사찰은 어디인지... 등등.

그 와중에 계속 비 맞고 있는 바나나 우유를 한 번씩 쳐다봤다. 가느다란 빨대 속으로 빗물이 들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카메라가 든 백팩도 이미 비에 젖어보였다.

 

바나나 우유와 카메라 가방을 지키기 위해 이쯤에서 대화를 끊기로 했다.

대화 주도권을 내가 가져오기로 했다. 

스님은 잘 모르시는, 나의 주특기인 인터뷰 형식으로 전환해 질문을 했다.

 

고향은 어디인지, 언제 출가했는지, 왜 종교를 바꿨는지 등등.

스님은 사생활을 다 털리고(?) 난 후에야 다시 걸어가셨다.

 

간식 꺼내며 좋아하던 위 사진에서부터 스님이 내려가신 후 비 맞은 바나나 우유 사진까지 시간 체크를 해보니 세상에... 2시간이나 걸렸다.

2시간 동안 '세상에 괴로워하는 중생'을 설득하신 스님도 대단하지만 빗물에 젖은 바나나 우유는 어쩌면 좋단 말인가.

'괴로움 그런 거 없어요. 다만, [하루 만보] 50일을 조촐하게 기념하며 추억거리 하나 만들려는 것뿐입니다'

 

 

나의 생각을 읽지 못한 스님은 '할 일을 다 했다'는듯 내려가시고 나도 빗물 들어간 바나나 우유를 서둘러 마시고는 얇은 패딩을 꺼내 입고 다시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다시 안개 낀 정족산성을 걸었다.

보슬보슬 내리는 비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내렸다. 차라리 한바탕 쏟아지면 좋겠다. 깊은 산사에서 맞닥뜨린 봄비에 대한 추억 하나쯤 간직할 수 있도록...

 

스님이 알려준 '입장료를 내지 않고 전등사에 들어올 수 있는 문'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 문까지 오는 수고가 입장료 내는 비용보다 더 크니 그냥 입장료 내고 들어오라고 일러주셨다^^

 

연둣빛에서 초록으로 가기 전까지의 자연을 아주 좋아한다. 한없이 바라보며 감상하고 싶지만 이미 삼랑성 정상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썼기 때문에 좋아하는 풍경은 눈으로 담고 빨리 걸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한 길인지 모를 '서해랑길' 표식.

걷고 싶은 길, 가고 싶은 곳 리스트엔 언젠가 마음먹고 걸어볼 길이 차고도 넘쳐난다. 

서해랑길도 포함되어 있는데 정족산성으로 연결되어 있는 건 처음 알았다 ^^

 

하나의 산성이지만 길의 표정이 다양해서 지루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 사진으로 보니 꽤나 으스스해 보인다 ㅎㅎㅎ 

 

반가운 내리막길을 걸어 남문에 도착했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났기에 서둘러 동문으로 향했다.

정족산과 마니산은 기운이 좋은 곳이라고 스님이 알려주셨는데, 그래서 그런지 작은 돌탑이 아주 많다.

나 역시 작은 돌탑에 소원 하나 올리고 어느 공간에 문서(?) 한 장 숨겨뒀다.

100일 되는 날 다시 꺼내볼 생각이다.

 

비는 조금 잦아진 듯싶으나 안개는 쉬이 물러날 기색이 안 보인다. 

드디어 동문에 다시 도착했다.

 

정족산성 동문 출발 오후 1시 15분, 도착 오후 4시 13분 ㅎㅎㅎ

스님과의 대화 시간 2시간을 빼면 정족산성은 한 시간이면 충분히 걸을 수 있는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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