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2018년 중국, 어느 가을날에 만난 사람 이야기를 하자면 먼저 등장인물 소개부터 해야 한다.
심 언니:
나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다. 같은 이름의 아파트(100여 동 정도 됨)에 사는데 보통의 아파트와는 달리 부유한 몇 집만이 산다는 마당과 차고가 있는 3층짜리 단독에 산다. 아파트 상가 댄스 학원에 남편과 함께 우연히 방문했다가 서른 명 정도 되는 중국 아줌마들 중에서 유일하게 나에게 말을 걸어준 사람이다. 그날 위챗(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같은) 큐알 코드를 찍어 위챗 친구가 되었다.
사진작가:
심 언니와 같은 회사에 근무하다가 정년퇴직한(회사마다 정년퇴직 나이가 다른지 모르겠으나 그들이 다닌 회사는 50세가 정년퇴직) 사이이며 나와 나이가 같다. 전문과 아마추어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전시회 경력이 있는 사진작가이다.
둘 다 아들 한 명씩 두고 있으며 둘 다 상하이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다. 심 언니의 아들은 상하이에 있는 한국 회사에 다니고 있어서 댄스 학원에서 만난날 우리가 한국인인 걸 알고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것이다. 심언니와 친해진 후 내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심언니 아들과 내가 한국어로 통화해서 해결하기도 했다.
본 내용으로 들어가겠다.
주말마다 집에 있기가 너무 무료해서 가까운 곳으로 산책하러 나가곤 했다. 그중 사가법기념관(史可法紀念館)은 한적해서 자주 가는 곳이다. 가을이면 하늘로 쭉 뻗은 은행나무가 유독 예쁜 곳이기도 하다.
그날도 우리는 남는 시간을 주체 못 하고 사가법기념관으로 향했다. 이미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한적했다.
느리게 느리게 걸으며 가을 정취를 감상하는 몇몇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로 웨딩 사진을 찍는 신랑 신부가 눈에 띌 뿐이었다.
신랑 신부 사진 찍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앉을만한 적당한 장소를 발견해서 자연스럽게 앉았다. 사가법기념관은 자주 가는 곳이어서 특별히 구경할 것은 없었다.
중년의 부부가 그렇듯 서로 말없이 앉아서 각자 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남편은 휴대폰으로 하는 고스톱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날도 당연히 고스톱을 하고 있었고, 그런 남편이 못마땅했지만 못마땅하다고 어찌하겠는가. 그런가 보다 하고 나는 나대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날이 어두워지면 절대 밖을 돌아다니지 않기 때문에 일찍 귀가하였다. 낯선 땅에서 나의 안전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우리들만의 원칙이 있기에, 의전이나 회사 부부 동반 행사 등 특별한 날이 아니면 해 지기 전 귀가는 꼭 지켰다.
그날도 저녁을 먹고 TV 보며 놀고 있는데 심 언니에게서 위챗이 왔다.
바로 아래의 사진과 함께 말이다.
"너희 부부 오늘 사가법기념관에 갔었지?"(중국어로 위챗이 왔는데 번역하면 이런 말)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 부부의 사진이 똭!!!
"네, 갔었어요, 이 사진은 언니가 찍은 사진이에요? 너무 자연스럽고 예쁘네요."
아니라고 했다. 심 언니가 사가법기념관에 있었다면 아마 아는 척했을 거란다.
알고 보니 이 사진은 심 언니의 지인인 사진작가가 찍은 사진이었다. 이때는 사진작가의 존재를 모를 때였고, 알고 난 후엔 위챗 이름을 '사진작가'라고 저장해서 진짜 이름이 기억 안 난다.
그날 사진작가의 동선은 이랬다.
남편이 출근해서 혼자 어디를 갈까 하다가 카메라 들고 사가법기념관에 갔단다.
저무는 가을 흔적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여기저기 다니며 사진을 찍고 있는데 우리 부부가 앉아 있는 것이 눈이 들어오더란다.
가까이에서 찍고 싶었지만 우리 부부가 앉아있는 자리 앞으로 몇몇 사람들이 거닐다 보니 사진 찍을 기회를 잡지 못하다가 드디어 기회가 와서 셔터를 몇 번 눌렀는데, 내가 카메라 셔터 소리에 힐끔 쳐다보더니 일어나서 가버렸단다.
사진작가가 보기에 우리의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 보였단다.
그날 사진작가는 우리 부부 사진에 세로로 글귀를 새겨 위챗에 올렸고, 심 언니는 위챗에 올라온 사진을 보자마자 우리 부부인 것을 알아채고 나에게 알려준 것이었다.
그 뒤 심 언니의 소개로 사진작가와 만나 셋이서 함께 놀러 다니는 일이 많아졌다. 덕분에 느슨하던 나의 중국어 공부는 교과서 속 내용이 아닌 실전 중국어로 바뀌었고 머리가 빠개질 정도로 새로운 단어 익히기에 바빴다.
사진작가는 '대충'이라는 법이 없었다. 표정이나 앵글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찍고 찍고 또 찍었다. 살면서 언제 이런 경험이 있었겠으랴. 똑같은 자세로 찍고 찍고 또 찍을 때면 나도 모르게 표정이 경직되어 사진작가를 지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사진작가답게 만날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나왔고 평소 다니는 길에서 사진을 찍어도 그녀가 찍으면 사진을 모르는 내가 봐도 색감이며 구도가 기가 막히게 예뻤다. 주말이면 남편과 함께 같은 장소에 다시 가서 사진 찍기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심 언니와 사진작가 둘이서 대화할 때는 내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양저우 사투리를 사용했고, 나와 대화할 때는 보통화(普通话)를 사용하며 배려해주었다.
퇴직 후 바로 연금을 받고 있다는 얘기며 아들 결혼을 대비해 미리 새 아파트를 사뒀다는 얘기 등등, 나라는 다르지만 비슷한 나이 또래의 아줌마들이 모여서 학교 교실에서는 들을 수 없는 얘기들을 나눴다.
때론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때론 마사지샵에 따라가고 때론 그들의 집에 초대받기도 했다.
셋이서 몰려다니는 곳은 어디를 가든 보통화와 사투리를 섞어서 사용하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카페는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 많아 보통화를 사용해서 마음 놓고 있어도 되지만 그들이 데리고 간 마사지샵은 직원들이 사투리를 사용해서 눈치껏 행동하거나 심 언니가 보통화로 번역해 주기도 했다.
하루는, 심언니가 친구들과 외국으로 단체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친구들에게 '한국인 친구 한 명 같이 가도 된다'고 이미 허락을 받았다며 나더러 같이 가자고 했다.
호기심에 따라가고 싶었고 남편도 다녀오라고 허락했지만, 만약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망설이다가 결국 거절했었다.
훗날, 한국인 교환학생이며 나와 같은 반이었던 한 여학생은, "다른 도시에 있는 대학교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갔다가 선생님과 같은 호텔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2박 3일 동안 늘 같이 붙어 다니고 호텔에서 밤새도록 얘기 나누다 보니 중국어가 많이 늘었다"는 얘기를 나에게 해주었다.
아, 그때 심 언니를 따라 여행을 갔어야 했다.
가을날 우연히 찍힌 사진 한 장으로 만들어진 인연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추억을 되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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