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곳에 가더라도 작은 배낭에 생수(목마를까 봐), 물티슈(비상용), 간식(초콜릿, 비스킷 - 굶거나 당 떨어질까 봐), 보조배터리(배터리 부족할까 봐), 손수건(여러 용도로 필요할까 봐), 현금(꼭 현금으로 계산해야 할 상황이 생길까 봐), 카드(필수), 휴대폰(필수) 그 외 날씨가 흐리면 접는 우산까지 넣어가지고 다녔다.
그러다 자주 챙겨 보는 유튜버가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걸을때 에코백 하나 들고 갔다는 영상을 보고는 꼭 필수로 챙겨야 할 물건만 가지고 나가보기로 했다.
가방을 아예 안 가지고 나간 건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그러나 유행 훨씬 전부터 갖고 있던 손바닥만 한 가방에 휴대폰과 카드 한 장 넣고 집을 나섰다.
원래 계획은 푸른수목원이었는데 변덕이 죽 끓듯 하다 보니 집을 나서면서 갑자기 바뀌게 되었다.
검암역 시천나루 선착장 - 경인아라뱃길 여객터미널
여객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어딜 가려고 한 게 아니다. 지도를 검색해보니 검암역 시천나루 선착장에서 걷기 시작하면 경인아라뱃길 여객터미널까지는 2시간 정도.
평지인 데다 아는 길이니 이 정도는 만만해 보였다. (아, 이 자신감 어쩔~)
짐이 없으니 발걸음도 가볍고 시천공원 자전거길이 잘 조성되어 있으니 경치 구경하며 걷기만 하면 됐다.
페달을 밟으며 나를 가로질러 달리는 자전거가 전혀 부럽지 않다.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것에도 감사할 정도로 삶의 자세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흉내만 내고 있다)
지난번 콜롬비아 친구 만날 때 같이 만난 한국어학과 교수 B와 잠깐 이야기 나눌 시간이 있었다.
콜롬비아 친구와 같이 있다 보니 따로 이야기 나눌 시간이 없다가 잠깐 '여행'과 관련한 대화를 나누다가 현재 B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같은 곳을 지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길게 썼다가 지웠다... )
몇몇은 '헬조선' 하면서 불평을 하지만 외국에서 살다 보면(여행 말고) 우리나라만큼 좋은 곳은 없다는 것.
경인아라뱃길을 걸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니 아무래도 애국심이 차고도 넘치는 것 같다. ^^
지도상으로는 2시간 걸린다고 했지만 멈춰서서 사진도 찍고 벤치에 앉아 잠깐 쉬고 하다 보니 예상 시간보다 훨씬 많이 걸렸다.
아라뱃길 양 쪽엔 샛노란 야생국화인 산국이 지천으로 피었다.
꽃송이는 손톱만큼 작은데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면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꽃송이가 한꺼번에 가을 향기를 내뿜는다.
자전거길이 끝날 때까지 국화 향기는 끊기지 않고 계속 되었다.
마치 품질 좋은 국화차의 향기를 맡는 느낌이었다.
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들은 얼굴을 모두 가리고 타기 때문에 국화 향기가 덜 느껴졌을 것이다.
오롯이 혼자 걸으며 국화 향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공짜라고 너무 많이 마셨나.
지금도 국화 향기가 나는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꽃향기여도 목마름까지 해결해주지는 않았다.
자전거길인데 편의점이 있을리 없다. 끝까지 걷는 수밖에...
경인아라뱃길 여객터미널까지 가려고 했는데 나를 스쳐간 수많은 자전거는 자전거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물론 그곳엔 간이화장실과 편의점이 있었다.(걷기는 여기서 접기로 했다)
바다와 맞닿은 편의점에서 생수와 간식을 사서 벤치에 앉았다.
동해나 남해바다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확 트인 바다를 보니 답답한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배낭이 없어서 어깨만 안 아플 뿐 그 외 허리, 무릎, 발... 모두 아팠다.
처음 출발 지점인 검암 시천나루 선착장까지 걸어갈 걸 생각하니 끔찍했다.
순간 이동하는 능력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때, 편의점 사장님이 "어디서부터 걸어왔냐"고 물으셨다.
집으로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많이 걸어서 다리가 아프다'는 말을 강조했다.
하지만 편의점 사장님에겐 통하지 않았다.
"검암에서 여기까지 매일 걸어서 출퇴근하는 사람들 많아요. 그 정도 걸은 건 아무것도 아니죠"
아, 그래요...?
나한테만 먼 거리였지 그 동네 사람들에겐 늘 걷는 거리였다니, 그렇다면 다시 걸어서 돌아가는 수밖에...
(물론, 걷지 않고 집에 갈 수 있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기필코 출발 지점까지 걸어서 가리라!!!'
자전거길 중간에 있던 데크길은 햇빛을 받아 은빛 물결을 이루던 갈대가 '낭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더니 돌아가는 길에선 신발을 벗고 걷는 길이 되어버렸다. 낭만이라곤 1도 없었다.
신발을 두 손에 들고 무거운 발을 한 발씩 걸을 때마다 데크길이 쿵! 쿵! 울렸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일 정도로 킹콩이 내딛는 발소리처럼 지축이 흔들렸다. ㅎㅎㅎ
지난번 강화에서 헤매던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길이고 아는 길이어서 걷기 쉽고 마음도 편했다.
다음엔 계양 방향으로 걸어볼까 싶다. 그땐 생수는 필수인걸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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